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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지 않을 나이라 놀랍지도 않았다. 벌써부터 국수 먹여주는 놈이 누군가 싶어 펴본 하얗고 심플한 디자인의 청첩장에는
박 찬열, 네 이름이 적혀 있었다.
***
남들 처럼 깨가 쏟아지는 알콩달콩한 연애라든가 가슴 절절한 연애도 없었다. 사실 남들이 느끼기에도 우리는 전혀 연인같지 않았다. 친구라고 하기에도 약간은 어색한 감이 있었지만. 그래서일까, 헤어지자는 말을 입밖에 내뱉는 순간조차 망설임이 없었다. 이별을 통보받은 너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사실 헤어져야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 상상했던 이별 장면은 이게 아니었는데. 울며불며 안된다고, 지금까지 별 탈없이 잘 사귀어왔는데 우리가 왜 헤어져야 하는 거냐고 이유라도 알면 안되겠냐고…하는 것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유정도는 물어볼 줄 알았다. 네가 이유를 물어본다면 나는 웃으면서 그 동안 즐거웠다고 이제는 조금 지루해졌다고 말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헤어지자는 말이 굳이 내 입을 통해서 나오지않았더라도 우리 둘 중 누군가 한명은 내뱉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너를 등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너와 헤어진 것도 잊고 '폐업 50% 세일! 그냥 다 가져가세요!'라고 쓰인 전단지에 정신이 팔려 지갑을 탈탈 털 기세로 가게 안에 들어갔다.
“여보세요.”
-백현아, 너 이따 밤에 시간 있냐?
“차고 넘쳐.”
-웬일이래, 오늘 애인 야근하는 날인가.. 아무튼 저번에 애들이랑 갔던 호프집있지? 거기로 11시 까지와. 너 이 새끼 갑자기 내빼기없기다!! 그럼 끊을게!
박찬열은 맨날 칼퇴근 하는데. 근무외수당 더 준다고 해도 야근안할거다 찬열이는. 말할 틈도 없이 자기 할 말만하고 끊어버린 친구때문에 괜히 혼자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평소엔 점잖은 네가 8시 땡치자마자 사무실을 쏜살같이 빠져나올 모습이 눈 앞에 그려지는 것만 같아서 우스웠다. 혼자 큭큭대다가 가게를 나섰다. 그제서야 나는 너와 헤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1시간도 채 되기 전 일이었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 보다 현재, 지금이 중요했던 나는, 학창시절 몇시간 내내 엉덩이 붙이고 앉아 공부하는 것보다는 운동장에서 공을 차고 뛰어노는 일이 훨씬 즐겁게 느껴졌었다. 이리 저리 온 운동장을 휘저으며 뛰고 난 뒤에 흘린 땀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으로 인해 마르면 단순히 시원함을 넘어서서 상쾌해지는 기분이랄까. 교실에서 에어컨 바람을 쐬는 것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일지도 모르겠다.
“진짜 한 모금만 마셔라. 야..! 다마시면 어떡해!!”
물먹는 하마에 빙의라도 된 듯 경수는 내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결국 다 마셔버리고 말았다. 분명히 한 모금만 마시라고 했건만 도경수 나쁜 새끼… 학교에서 5분 정도 떨어져 있는 슈퍼에 다시 가기도 귀찮고 급식실 정수기 물이라도 마셔야겠다 싶어서 얄미운 도경수 머리를 한대 갈기고는 운동장 스탠드에서 일어나 급식실로 향하려는데,
“이거 마셔.”
갑자기 앞이 어두워지더니 내 앞으로 물이 내밀어졌다. 뚜껑도 따지 않은 물이었다. 누군지 궁금하여 얼굴을 보려고 고개를 들었을 때 내 시야에 보이는 것은 키가 정말 컸던 한 남학생이 운동장 한가운데를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걸어가는 모습이었다. 경수가 아는 애야? 하고 물어왔지만 나는 그냥 고개를 젓기만 할뿐이었다.
‥그게 박찬열과 나의 첫만남이었다.
다음날 우리 반 교실은 앞문 뒷문 할 것 없이 아이들로 완전히 봉쇄되어있었다. 창문에도 적지 않은 아이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그 사이를 겨우 비집고 들어가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옆에 있던 녀석에게 물어보니 3반아이랑 우리반 아이랑 시비가 붙어서 싸움이 났단다.
남자애들의 싸움이란 본디 사소하고 유치한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어서 딱히 이유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좀 논다 하는 아이들이 싸움이 난 주위에 우루루 몰려있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에 얼굴을 자세히 확인해보니 우리반 장애우와 3반의 노는 아이였다. 게다가 싸움이 났다기보다 우리반 장애우가 거의 일방적으로 맞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도 말리지 않고 지켜보는 이 상황에 너무나도 화가 났다. 덤으로 재밌다는듯이 웃고 있는 아이들까지.. 평소에도 쓸데없는 정의감에 불타올랐던 나는 무작정 그 속에 끼어들어 맞고 있는 우리반 아이를 감싸안았다.
“뭐야, 이 새끼는?”
“쳐돌았냐? 존나 비겁한 새끼가 따로 없어요.”
“이런 건방진 새끼를 봤나!!”
순식간에 나는 3반 아이에게 들려 내동댕이 쳐졌다. 책상에 부딪힌 뒤가 너무 아팠지만 바닥을 짚고 다시 일어섰다.
또 한번 주먹이 날라왔다. 볼이 얼얼했다.
어쩔 줄 모르고 울듯이 지켜보던 경수가 입모양으로 선생님 불러올게- 하고는 교실 밖을 나갔다. 맞은게 아프기도 아팠지만 앞으로 남은 1년의 학교생활로 인해 나는 3반 아이를 때릴 수가 없었다. 그저 타겟이 나로 옮겨와서 다행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냥 집어던지고 주먹 한번 날린게 전부인데?”
쿵-
눈깜짝할 새 벌어진 일이었다. 3반 아이가 한 아이에 의해 아까의 나와 같은 자세로 내동댕이 쳐진 것은. 내동댕이 쳐진 것도 모자라 마구 짓밟히고 있었다. 광기 서린 듯 주먹을 날리고 발로 짓밟는 모습에 아이들은 기겁하여 그제서야 싸움을 말리기 시작했다.
한 팔에 두 세명의 아이들이 달라 붙어 제지했음에도 그 아이의 분노는 사그라들줄 몰랐다. 때 마침 경수가 불러온 선생님 덕분에 싸움은 일단락 됐고 우리반 아이들은 제외한 나머지 아이들은 각자의 반으로 돌아갔다.
“뭐가?”
“박찬열 쟤 중학교 때 같은 반애 죽도록 패놔서 이 동네로 이사온거래.”
“헐, 대박이다.. 그래도 노는 애들 중엔 쟤가 제일 얌전해서 왜 저런 애들이랑 같이 다니나 했는데.”
아마도 여자애들이 잘생겼다 뭐다 성격도 시크한게 차도남이 따로 없다 했던 놈이 박찬열이었던 것 같았다. 복도에서 오다가다 마주친적이 있어서 얼굴도 생각날듯 말듯하고.
“근데 백현아 너 괜찮아?”
“괜찮아. 참나 한 대 맞은거 갖고..”
“그래도 다행이야, 저 놈 소문이 워낙 안좋아서 아무도 싸움 못말렸었어.”
반 아이들이 내게로 몰려들어 괜찮냐고 물어왔다. 볼이 조금 욱씬거리는거 빼고는 괜찮았다. 옆에서 누가 쿡쿡 찔러오길래 돌아보니 경수가 백현아, 어제 운동장 걔.. 하면서 말끝을 흐렸다. 걔가 뭐? 하고 되물었지만 경수는 대답이 없었다. 도경수 궁금하게 왜 그래. 뭔데, 뭔데! 경수를 다그쳤지만 경수는 왔네, 하고 전혀 상관없는 말을 했다.
그러자 시선이 내 왼쪽 볼로 옮겨갔다. 박찬열이 두 손으로 내 볼을 감쌌다.
그제서야 경수는 어제 물, 쟤야. 라고 넌지시 말했다.
내 볼 위로 얼음이 담긴 봉지가 얹혀졌었다.
“끝말잇기 하자.”
“뜬금없이 무슨 끝말잇기야.”
7월, 초여름이 지나고 장마철을 넘긴 여름 중순. 내일 모레 있을 기말 고사를 위해 우리 둘은 박찬열네 집에서 선풍기 바람을 쐬며 문제집을 푸는 중이었다.
'의'로 시작하는 단어가 뭐 있더라..?
“의?..의사!”
“사귀자, 나랑.”
“랑...랑으로 시작하는 말이 있ㄴ..잠깐만 뭐라고?”
“랑으로 끝나는 말없어, 내가 이겼으니까 아이스크림 쏴.”
‥어디서 본건 있어서 너는 고백도 유치한 방법으로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되게 웃긴 상황이었다. 결국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다시 시작한 끝말잇기에서는 내가 이겼지만. '좋아해 찬열아. 나랑 사귈까?' '까'로 시작하는 단어는 참 많은데. 바보.
***
예식장에 들어서니 고등학교 때 동창들이 많이 보였다. 너는 앞에서 한 명 한 명 악수하며 웃고 있었다.
언젠가 막연히 너의 정장입은 모습을 보고 싶다고 생각한적이 있었다. 쭉 뻗고 훤칠한 네가 정장을 입으면 얼마나 멋질까, 하고.
그 때보다 많이 성숙해진 너는 지금까지 본 중에 제일 멋졌다.
“오늘 좀 멋있다, 너.”
“와줘서 고마워.”
“고맙긴, 결혼 축하해.”
내 입으로 결혼 이란 단어를 꺼내는 순간에도 난 멀쩡했다. 심지어는 신랑 입장! 소리가 들려오고 네가 신부 아버지에게서 신부손을 건네받는 순간까지도. 나는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그냥 신부가 참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식이 끝나고 뷔페도 들리지 않은 채 예식장을 빠져나왔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차를 가져오지 않아 다행이었다. 때 마침 택시가 보였다.
'박찬열.'
'왜.'
'넌 왜 맨날 창 밖만 쳐다봐?'
'그냥, 차 안이답답해서.'
오랜만에 운전석이 아닌 곳에 앉으니 네 생각이 났다. 너와 나눴던 대화도. 그 때의 너처럼 나는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다가 터널안으로 진입했을 때, 나는 목놓아 울 수 밖에 없었다.
그 때의 네가 보던 것은 다름아닌 창문에 비친 나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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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은 대략 한달전에 ㅇㅇ2에 올렸었던 조각입니다 핳...
현재랑 과거가 뒤죽박죽 섞여있어서 읽기 힘드셨을지도ㅠㅠ
한가지 말해드리고 싶은건 찬열인 백현일 정말 정말 좋아했어요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