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친의 정석 :: 01
By. 아리아
전남친이란 색안경을 끼고봐도 다른 배우들과 급이 다른 연기를 보이는 이석민에 나를 제외한 모든 스텝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올망졸망모여 눈을 빛내며 저를 바라보는 그들에 결국 난 긍정의 뜻을 표할 수 밖에 없었다.
"연락드릴게요. 수고하셨습니다."
그 뒤로도 몇 명의 배우를 봤지만 이미 스텝들 마음 속의 남자 주인공은 이석민으로 정해진 것 같았다. 눈길 한 번 제대로 주지 않으면서 채점표를 낭비 중인 그들이었다.
"작가님, 주연은 이석민씨로 하실거죠?"
"..해야죠,뭐."
"조연 분들한텐 저희가 연락할테니까 이석민씨한텐 작가님이 연락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대학 동문이시던데-"
"..."
돌아오지 않는 제 대답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자리를 정리하는 스텝들을 뒤로한 채 몇시간을 박혀있던 세미나 실을 나왔다. 방송국 복도의 차가운 공기가 제 몸을 감싸왔다.
띠링-
[작가님 이석민씨 번호예요! 감독님이 오늘 내로 연락해주셨으면 좋겠다고 전해달라셨어요!!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조연출 김민규]
문자일 뿐인데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보내진 번호를 눌렀다. '이석민' 익숙한 듯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름에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왜 하필 너야.
통화 버튼 주변을 맴돌던 작은 엄지손가락이 결국 내려앉고 말았다. 뚜- 뚜- 몇번 들리지 않은 연결음이 금방 끊겼고 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석민입니다."
"..."
"여보세요?"
"..작가님?"
"..아, 네. 네? 전 줄 어떻게-"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 머리가 띵해졌다. 내 번호 아직 안 지웠나 어떻게 바로 난 줄 알지. 잠시 넋을 놓고 있다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휴대폰을 고쳐 잡았다.
"강은석 역, 캐스팅 되셨어요."
"ㅇㅇ야."
"다음 주에 첫 화 대본리딩 있으니까 방송국 9ㅊ-"
"김ㅇㅇ."
무슨 할 말이 남았길래 저리 다정히 제 이름을 부르는건지. 애써 무시하며 말을 이어 나갔지만 또 한번 제 귓속을 파고드는 단호한 목소리에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왜."
"방송국 밑에 카페에 있을테니까 내려와."
거부의사를 표현하기도 전에 뚝 끊어져버린 전화에 차가운 복도에 힘없이 주저앉아버렸다. 헤어진지가 언젠데, 아직도 저 놈의 목소리 하나에 이렇게 떨리는지.
**
"..."
"..."
어색해 죽을 것 같다. 사람하나 없는 카페에 단 둘이 마주하고 앉아있는 꼴이 참.
"드라마 왜 한다고 했어."
"시나리오 좋길래."
"내 글인 거 몰랐어?"
"딱 보자마자 알겠던데."
절로 한숨이 나오는 그의 태도였다. 알 수 없는 답답함에 머리를 쓸어넘기다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했다.
"알겠으면 재꼈어야지 왜 오디션장까지 나타나? 같이 일하는거 너나나나 불편하잖아."
"안 불편하면?"
"뭐?"
푹 눌러쓴 모자를 벗어 머리를 정리하는 그에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안 불편해. 그리고,"
"..."
"우리 이야긴 거 눈에 딱 보이는데 그걸 재끼라고?"
허를 찌르는 그의 말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번 작품은 명백히 그와 나의 이야기였으니.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제 시야를 뿌옇게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조금만 시간을 지체한다면 또 다시 그 앞에서 눈물을 보일 것 같아 결국 턱부근에 있던 마스크를 끌어올리며 일어났다.
"..우리 얘기 아니야."
제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것이 우리의 이야기라는 걸 인정한다면 그와의 사랑이 행복했단 걸 인정하는 꼴이 되어버리는 것 같아 그 알량한 자존심을 지켜내고야 말았다.
"드라마 잘 생각해보고 연락줘."
그의 대답을 들을 시간조차 주지 않은 채 급히 카페를 빠져나왔다.
카페가 있던 코너를 지나자마자 겨우 지탱하고있던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굳이 일어서려는 노력은 하지 않은 채 살며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애써 떨쳐냈던 이석민의 잔상이 또 다시 떠올라 고개를 내저었다. 헤어진지가 언젠데, 왜 이제서야 나타나서 제 마음을 이리도 싱숭생숭하게 만드는지. 알콜이 당기는 날이다.
**
힘없이 번호키를 눌러 아늑한 공기가 맴도는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푹신한 느낌에 잠시 뒹굴거리다 싱숭생숭했던 오늘 하루를 탓하며 시원한 맥주 캔을 땄다.
"뭐 재밌는 거 안 하나."
그냥 맥주만 마시기엔 어딘가 처량해 보이는 제 모습에 티비를 켰다. 실없이 웃음만 보이는 예능 프로그램에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던 손이 한 곳에서 멈춰섰다.
"안녕하세요 배우 이석민입니다."
예쁘게 웃어보이며 인터뷰에 응하는 그의 모습이 예전의 우리를 떠올리게 만들어 결국 티비를 꺼버렸다. 꺼진 검은 화면엔 한없이 작아진 제 모습이 비쳤다.
아직도, 네게 미련이 남은걸까. 알 수 없는 감정에 안고 있던 쿠션으로 얼굴을 묻어버렸다.
***
부시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소리의 근원지인 부엌으로 향하자 익숙한 뒷태에 식탁 의자를 끌어내 앉아 인기척을 냈다.
"언제 일어났어?"
"그러는 넌 언제왔냐. 안 바빠?"
"바쁘지. 이거만 넣고 바로 뉴스 들어가야 돼."
"엄만 너 바쁜 거 알면서 왜 자꾸 너한테 시키지."
"이석민 다음으로 내가 제일 믿음직스럽다 그러셨어."
어찌보면 나보다 더 이석민을 좋아했던 엄마였다. 그걸 옆에서 지켜보았던 최승철 입에선 당연스레 나온 말일텐데 오늘따라 그 말이 제 가슴 깊숙히 박혔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들린 그의 이름에 넋을 놓고 있는 저에 손을 털며 맞은편에 앉는 승철이었다.
"괜찮아?"
"뭐가."
"이번 작품 주인공 이석민이라면서."
"그건 또 누구한테 들었대."
"누구겠냐, 민규지."
"어제 9시 뉴스 끝나자마자 뉴스룸 헐레벌떡 들어와서 알려주던데?"
"걔도 어쩜 그리 한결 같냐. 대학 때도 뭐만 하면 너한테 다 얘기하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의자에 걸쳐져있던 수트 자켓을 들고 일어나는 승철의 뒤를 따랐다.
"너네 안 좋게 헤어진 것도 아니잖아. 미련 남은 거 아니면 굳이 마다 할 필요 없을 것 같은데. 그 라인업에 너 작품이면 시청률 50퍼센트 금방일걸."
종일 다 맞는 말만 하는 최승철에 괜히 찔려와 그의 팔뚝을 때리며 집 밖으로 내쫓았다. 머리가 복잡하다.
띠링-
[작가님 오늘 인터뷰 안 잊으셨죠? 3시까지 K방송국 밑에 카페로 와주세요! -K방송사 부승관 기자]
기자님껜 죄송하지만 잊고있었다. 그것도 새까맣게. 대충 답장을 보낸 후 시간을 확인하곤 급히 화장실로 향했다.
"작가님, 여기요!"
오늘도 긍정 에너지를 마음껏 뿜어내고 있는 기자님에 살며시 미소를 띄우며 다가가갔다.
"밖에 춥죠- 작가님 커피 시켜놨는데 안 식었을라나 모르겠네."
"괜찮아요. 너무 뜨거운 것보단 낫죠. 인터뷰 시작해요."
"아, 네!"
뭐, 모든 인터뷰가 그렇듯 근황부터 시작해 이전 작품의 인기를 실감하느냐 등 정석대로 진행되고있었다. 그에 따라 나도 정석대로 대답하고 있었고.
"다음 질문 드릴게요. 이번 작품이 작가님 실화라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만큼 시청자분들의 기대가 더 큰데 작품 소개 간단히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제 실화라는 이야기는 도대체 어디서 흘러나온 것인지. 머리가 띵해지는 느낌을 겨우 붙잡으며 대답을 이어나갔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건 맞는데 제 이야기는 아니에요. 그냥 대학생들 사랑 이야기죠. 자세한 건 드라마로 봐주세요-"
방송용 미소로 흔들리는 제 마음을 겨우 감추었다. 그 뒤론 반쯤 멍을 때리며 인터뷰에 임했던 것 같다. 질문이 뭐였는지, 대답은 어떻게 했는지 조차 기억이 희미한 걸 보면.
"수고하셨어요. 저 바로 회사로 들어가봐야 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역시나 끝까지 긍정 에너지를 뿜고 가는 기자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갑자기 울리는 카톡- 소리에 황급히 휴대폰으로 눈을 돌렸다.
새 작품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단톡방에서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있는 출연진들, 스텝들이었다. 아직 읽지 않은 건지 말이 없는 이석민에 휴대폰 홀드를 꺼 주머니에 대충 집어넣었다.
대본 마저 써야되는데. 커피나 사가야지.
"아메리카노 샷추가해서 한잔,"
"카라멜 마끼아또 한 잔이요. 휘핑크림 많이 올려서요."
"저기요, 제가 먼저 주문했는데."
그리 바빠보이지도 않는데 새치기를 해 먼저 주문을 해버리는 남자에 고개를 돌려 따지고 들었다. 하지만, 이내 제 목소리는 갈길을 잃고 말았다.
"..."
"..."
이석민이었다. 뭐 어디서 촬영이라도 하고 온건지 수트에 머리를 올려 말끔한 차림의 그에 비해 짧은 머리를 질끈 묶어 여기저기 삐져나온 저의 모습에 부끄러움이 밀려와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카라멜 마끼아또 한잔, 아메리카노 샷추가 하신 거 한잔 나왔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아메리카노를 집어 드려는 순간, 제 손엔 달달한 카라멜 마끼아또가 쥐어졌다.
"아메리카노 못 마시잖아."
"마실 수 있으니까 내놔."
"글 쓴다고 이거 마시고 밤 새려는 것 같은데."
"..."
"몸 상해. 그냥 그거 마셔."
매몰차게 차버린 건 난데, 그런 저에 상처를 받은 건 자신일텐데, 이석민은 끝까지 다정했다.
바쁜 것인지 그 또한 이 자리가 불편했던 건지 그는 아메리카노를 들고 카페를 급히 빠져나갔다. 그리고 난 제 손에 쥐어진, 대학 시절 내내 달고 살았던, 휘핑 크림이 듬뿍 올라간 카라멜 마끼아또를 한참 동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너도 아메리카노 못 마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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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으 사스가 벤츠남 석민이..! 상받은 세븐틴 축하해요♥
아 그리구 제목 바꿨습니당!!!!! 신경외과도 조만간 업로드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