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마셔 다들!"
"야 이제 지겹다 좀… 나 술 그만 마시고 싶어 레알."
"나도. 한 방울이라도 더 들어가면 토할 것 같은데."
"우리가 무슨 대학 새내기냐, 이렇게 존나 마시고."
"그니까."
"니네 다 취하면 또 내가 다 뒷바라지해야 되잖아? 어우 지겨워."
"그러게…."
"야. 너 그만 마셔. 야. 야!"
○○○은 술이 셌다. 정말 셌다. 집안 대대로 말술이었고, ○○은 자기 주량을 한 번도 끝까지 재어 본 적은 없었지만 하여튼 혼자 소주 여섯 병까지 먹어봤다. 사람이 술을 먹는지 술이 사람을 먹는 지 모르는 기분에, 내가 마늘이 되는 것 같고 내가 쌈장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긴 해도. 어쨌든 필름이 끊기거나 개가 되거나 하진 않는 걸 보니.. 한계는 아직 멀기만 하다. 그런데 술이 안 취하면 시발, 안 좋은 것들이 더 많아. 내가 이 개자식들 뒷바라지를 다 해야 하고, 속상한 일이 있어서 술 먹고 좀 뻗으려고 해도 존나 취하지를 않아서 결국 같이 술 먹던 친구 뒷바라지를 해야 한다.
주변을 휙 둘러봤다. 개로 퇴화 중인 변백현과 김종대, 오세훈. 셋이서 무슨 할 얘기가 저렇게 많을까. 자세히 들어보니 또 군대 얘기다. 존나 지겨워. ○○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그 옆엔 엄마한테 전화하는 강슬기. 슬기는 ○○과 눈이 마주치자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래 쟤가 나쁜 애는 아니지, 예쁘고, 착하고, 사근사근하고, 남자애들이랑 잘 지내고, 종인이랑 친하고… 그래. 내가 문제지. 내가 문제. ○○은 자기에게 술 따라줄 사람이 없는 걸 깨닫고 자작을 시작했다. 미친 내 인생… 매일 하는 생각을 굳이 지금 또 반복하며 소주병을 붙잡았다. 박찬열은 정말 '알코올이 1g이라도 내 체내에 더 흡수되면 나는 알코올 고래가 된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우리 운전은 또 누가 하냐… 미친 것들이 왜 회식하는 날에 차를 가져와? 대학생 밴드는 안 그래도 쪼들리기에, 이런 날 대리 부를 짬밥도 아니었다. 푹 한숨을 쉰 ○○이 소주병을 들어올리자, 그 소주병을 쥔 손을 저지하는 손길이 있었다. 어라, 이거 누구야.
"내 생각엔 누나 그만 마셔도 될 것 같은데요."
"……."
"속 베려요."
"넌 술 안 마셨어?"
"네."
"왜?"
종인이는 기특하게도 한숨까지 내뱉으며 대답한다. ○○은 대화할 틈을 잡았다는 사실에 몰래 주먹을 쥐고 쾌재를 내질렀다. 여긴 사람이 없고 개들 밖에 없으니 방해받을 건덕지도 없다. 그냥 내가 잘 이끌면 되는 거야. 내가 종인이를 이렇게 저렇게 잘 휘두르고 자극하면 되는 거야. 박찬열이 말해준 꿀팁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질투를 하게 하라 이거였지. ○○은 얼른 레파토리를 짜기 시작했다. 구남친? 그런 건 인생에서 없었다. 첫사랑? 그건 죽기보다 더 싫다. 그럼 뭐 하지.
"저라도 사람 꼴이어야 이 사람들 집에 데려다주고 좀 처리할 거 아니에요. 누나 혼자 하게 시킬 수는 없으니까."
"그래. 고맙다."
"누나 근데 진짜 안 취하네요. 난 누나가 인사불성 되는 걸 본 적이 없어."
"나도 내가 개 된 거 본 적이 없어서 말이지."
"부러워요."
"좆같다니깐. 야, 괴로워서 친구 불러다 술을 마셨는,데 난 풀릴 만큼 마시지도 못하고. 친구 핸드폰 뒤져서 얘 업어가달라고 연락해야 되는 꼴이 얼마나 슬픈 줄은 알어?"
"……."
"게다가 꼭 남자친구야. 남자친구는 나한테 지랄을 해. 얘를 이만큼 멕이면 어쩌녜. 어이구, 염병."
"남자친구 있는 거, 부러워요?"
"아니. 별로. 딱히 남자친구가 부러운 건 아닌 것 같은데."
시발. 종인은 ○○의 귀에 들리지 않을 만큼 아주 작게 말했다. ○○은 이상한 이유로 자책 중이었다. 나 너무 욕 많이 쓴 거 아닌가. 여성성이 존나 없어보이나? 아 시발 안 되는데. 내 연애 역시 조진 건가. 그래도 종인의 표정이 아주 나쁘지만도 않았다. …괜찮은 건가? ○○은 조심스럽게 얘기를 이었다. 욕은 많이 안 쓰고.
"부럽진 않은데 내가 남자친구가 없단 게 빡쳐."
"그럼 만들면 되죠."
"몰라 난 평생 무성애자로 살다 뒤질 참인지… 야 왜 나는 길 가는 남자를 봐도 막 어머! 저 남자 번호는 따야 해! 이런 게 없을까."
"누나 눈이 높나봐요."
"글쎄. 내가 접때 스벅 알바했었잖아. 기억나?"
"네."
누나가 만들어준 커피 진짜 맛있었어요. 맨날 먹고 싶어서 맨날 찾아갔는데. 기억이 안 날 리가. 종인이 아주 작게 말했다. ○○은 꼭 이런 중요한 대사를 소주잔을 엎지르는 바람에 놓쳤다. 종인은 그냥 한숨을 푹 쉬며 손 닦는 티슈를 갖다댔다. ○○이 민망한 듯 살풋 웃었다.ㅡ물론 종인의 눈에서 한 차례 미화된 문장이다.ㅡ
"나 거기서 진짜 조온나 천상 내 스타일인 남자 만났거든?"
"어떤데요?"
"하얗고, 무쌍. 그러니까 쌍꺼풀 없고, 얼굴 선 갸름하고, 나이도 나보다 두 살인가 많았나?"
존나 시발. 종인은 또 ○○의 뒤에서 욕을 씹었다. 지금 나 엿먹이려고 일부러 거꾸로 말하는 거겠지? 시발 저게 진짜 이상형 아니겠지? ○○은 종인의 눈치를 살폈다. 뭐야. 얘 표정 아무렇지도 않은데? 뭐야? 질투할 거라고 했는데? 막 이 쯤 되면 테이블 쾅 치면서 그 개자식이 누구야!! 라고 소리 질러야 되는 거 아니야? 아 시발 뭐지 내 연애 조진 건가... 아니면 또 욕 써서 그런가? ○○○은 자동 울상을 지었다.
"하여튼. 그 남자가 며칠 째 오는데 내가 며칠 째 막 도키도키 가슴 뛰고 별 지랄 다 떨었단 말야. 아, 내가 사마천은 아니구나 싶었지."
"네."
"그 남자가 결국 나한테 물어봤어. 남자친구 있어요? 번호 물어봐도 될까요?"
"……."
종인은 주먹을 꽉 쥐었다. …! 지금 맘 같아선 테이블 쾅 치며 그 개자식이 누구냐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당장 누나 손목 붙잡고 길거리 뛰어들어 그 새끼를 줘패러 가고 싶었지만, 누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를 잇고 있었다. 종인은 화를 삭이기 위해 눈을 꾹 감았다. 아니야. 저번에 오세훈이 누나 남자친구 없다 그랬어. 썸남도 없다 그랬어. 아니겠지.
"종인아, 자?"
"아뇨. 계속 말하세요."
"하여튼 그 남자가 막 무지 이쁘게 웃으면서 그런 말을 하는데, 시발 내 주둥아리가 멋대로…."
"뭐라 그랬는데요."
"남자친구 있다 그랬지. 거기다 확인사살도 했어. 님 내 스타일 아님여. 진짜 존나 오세훈이나 쓸 것 같은 개찌질이 말투로."
"진짜요?!"
"너 왜이렇게 기뻐하냐. 나 그래 존나 쑥맥이야. 존나 철벽녀라고. 그 뒤로 어떤 사람이 나 맘에 담는 거 같으면 존나 엄마 결혼반지 빌려 끼고 알바 뛰었다고."
종인은 오늘 처음으로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 진짜여? 으학학학. 물론 영문을 모르는 ○○은 이 새끼 왜 웃냐, 나 비웃냐며 등짝을 갈겼다. 종인은 아니라며, 그냥 웃기다고 변명했다. 종인은 '내 여자의 철저함' 따위의 구린 단어들이나 연상하며 기뻐하고 있었다.
솔직히 ○○은 종인을 자극하기 위해 저런 말을 부러 꺼냈다. 그 와중에 제 스타일을 들키지 않으려 종인과 정반대 스타일로 말하긴 했는데, 아 이거 좀 쪽팔린 것 같은데. 내가 이렇게까지 삽질을 해야 하나. 지금 일년 반 째 삽질 중이다. 이 쯤 되면 쟤도 날 좋아해야 되는데. 종인이 처음 밴드에 들어온 순간부터 첫눈에 반했다는 개도 안 믿을 레파토리를 들이대던 ○○○은 박찬열을 봉으로 잡고 매번 연애상담 중이다.
- 찬열아. 쟤가 나 아직도 안 좋아하는 것 같지 않냐.
- 좋아하는 것 같은데?
- 시발, 근데 강슬기랑 저렇게 호호 웃고 있어?
- 둘이 그냥, 나루토 얘기 하던데.
- 혹시 알아? 쟤네 둘이 사귈지? 아 시발, 빡치네?!
- 야, 욕 쓰지 말랬지. 너 여성성 제로인 거 종인이한테 존나 현수막 펼치고 알리고 싶으세요?
- 지금 욕이 안 나오게 생겼냐. 내 남자를 뺏기게 생겼는데?!
- 쟤가 왜 니 남잔데? 야 니 남자면 좀 적극적으로 추진해 봐! 좀 달라붙고, 좀 웃어주고, 좀 만지작대기도 하고 그러라고.
- 내가 그걸 어떻게 하는데? 나 남자공포증 있는 거 알면서 그러냐? 나 성격장애에 사회력 부족 있는 거 알면서 지껄이는 거야?
- 하이고 지랄도 가지가지… 야. 막말로 스물 넷에 아빠 말곤 뽀뽀도 안 해 본 모쏠이 어딨는데?
- 여깄잖아! 그래서 장애 생겼잖아!
- 몰라. 니가 잘 꼬셔봐. 잘 자극해봐.
- 뭘 자극해? 벗고 가? 존나 빨간 속옷 입고 가서 실수인 척 빙자하고 벗으면 자극되냐?
- 얘는 생각하는 게 왜 이렇게 쓰레기야? 변태냐? 걍 잘 찔러보라고. 남자는 질투! 질투의 화신이지! 내 여자는 내가 지킨다!
몇 시간 전 찬열과의 대화이다. 나 나름대로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찔렀는데... 이거 안 먹히면 어쩌지?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 가 되면 어쩌지? ○○○은 그런 고민이나 하고 있었다. 정작 김종인은 찔리는 대로 푹푹 들어가는 무른 두부였다. ○○○의 뜬금포 철벽녀 영웅담에 열성적으로 찔린 김종인은 몰래 누나 손 끝에 새끼 손가락을 갖다댔다. 누나는 손도 되게 가느다랗고 예쁘네. 피아노 치는 여자라 그런가. 안 그래도 하얀 누나는 손가락도 하얬다. 아, 진짜 내 여자 만들고 싶다. 종인은 끙끙 앓으며 손가락 끝에 닿은 ○○○의 지문 하나라도 더 만지려 애를 썼다. 변태 같지만, 원래 짝사랑을 하면 사람이 또라이가 된다. 이렇게라도 닿고 싶대잖아. 어쩔 수 없는 거다.
"종인아."
"어."
그 때 슬기가 종인이를 불렀다. 종인이는 손가락을 쳐다보다가 고개만 휙 돌려서 슬기를 쳐다봤다. 슬기가 뭐라고 하는 것 같은데 ○○에겐 잘 안 들린다. ○○은 쪼로록 자기 맥주 잔에 소맥을 말기 시작했다. 먹고 죽고 싶다 그냥. 나는 왜 연애를 못할까.. 슬기 반만 닮고 싶다. 슬기 반의 반만 닮아도 종인이는 진작에 꼬셨을 것 같은데.
변백현이며 오세훈한텐 막말도 찍찍 까고 등짝도 잘 때리면서 김종인한테는 말도 잘 못 거는 ○○○이다. 그런데다 방금 자기가 한 말을 되돌려보니까 시발, 나는 왜 항상 좆같은 소리만 하는 걸까. 대체 저걸 왜 말한 거지? 저걸 자극이라고 말한 건가? 걍 무성애자 인증 같은데? 그냥 나는 사마천이다 삼창한 기분인데? 결국 ○○은 테이블 위로 우르르 쏟아지듯 엎드렸다. 아아… 나는 진짜 죽어야 되나. 오늘도 차근차근 흑역사를 적립한 ○○○은 대충 만 소맥을 원샷했다.
○○은 종인이랑 슬기의 대화가 끝나길 기다리며 들리는 노래에 맞춰 고개를 대충 까딱였다. 턱 끝에서 머리카락이 달랑거렸다. 그러고 보니 머리카락이 너무 짧아서 그런가? 슬기는 머리카락도 긴 생머린데... 나도 머리나 길러볼까? 사실 ○○은 머리카락을 평생 길러본 적이 없다. 맨날 턱, 턱에서 좀 길어졌다 싶으면 또 자르고. 대신 화장을 좀 진하게 하는 편이었는데, 이게 너무 여자로서의 매력이 없나. 나도 청순으로 밀어붙여야 되나. 아니, 그런데 이 짜리몽땅한 몸으로 어딜 봐서 청순. 내 머리 언제 길지. 그것보다 이 새까만 머리부터 좀 갈색으로 염색을 해야 하는 건가. 일단 가발부터 사 볼까… 고민하는데 종인이 ○○의 팔을 탁 붙잡았다.
"누나. 이제 가요."
"너가 운전해?"
"네. 일단 연습실에 다 버리려고요. 집까지 데려다주기 힘들 것 같은데."
그래 잘 생각했네. ○○○은 그렇게 말하며 클러치를 챙기고 박찬열을 깨웠다. 박찬열은 부스스 일어나 살짝 비틀댔다. 야, 정신차려. 가볍게 말하자 찬열이 ○○의 정수리 위에 턱을 올려놨다. 이것도 한참 허리를 숙인 거였다.
"야. 나 여친한테 문자 좀 대신 쳐 줘라. 술 마시고 지금 집 들어간다고."
"니 말투로 대충 쳐서 보낸다?"
"엉."
○○은 박찬열 핸드폰을 켜 들었다. 카톡을 키자 오그라드는 이름 하나가 보였다. 이거겠지. ○○은 심드렁하게 키패드를 두드렸다.
'우리 자기 ㅜㅜ 기다리게 햇ㅅ서 ㅁ안 ㅠ 공연 ㄱ끄ㅌ나구 술 마셧어 이제 집 들어ㄱㅏ 걱정하지 마ㄹ고 푹 자 자기 ㅅㅏ랑해~'
박찬열은 술에 취하면 맨날 자음 모음을 분리하는 습관이 있다. 손가락이 취한 게 아닐 텐데 왜 저럴까. 어쨌든 ○○은 박찬열 여친한테 사랑한단 말까지 알뜰살뜰히 챙겨주고 핸드폰을 자켓 안주머니에 넣어줬다. 미안. 니 남친 지금 개 됐어. 그런 말은 못 하고. 툭툭 찬열의 자켓을 털어주자 박찬열의 제 팔을 ○○의 어깨 위로 둘렀다.
"무거우니까 잘 걸어라. 니 한 번 삐끗하면 나 압사당해서 죽어."
"……엉."
박찬열을 걸치고 고개를 딱 들었는데, 종인이와 눈이 마주쳤다. 종인이는 무표정을 하고 있었다. ○○○은 박찬열이 자꾸 무게중심을 제게 쏟는 것에 짜증이 나서 인상을 있는 대로 쓰며 말했다.
"뭐해. 김종대랑 변백현 좀 챙겨줘."
"아… 네."
○○○은 박찬열을 차에 싣고 다시 되돌아와서 오세훈을 흔들어 깨웠다. 야. 일어나. 그러자 오세훈은 됐다며 지가 비틀대며 일어났다. 젊은 게 좋긴 좋아, 저렇게 퍼마시고도 걸을 수 있고. 차에 타라~ ○○은 곱게 말해준 뒤 종인이가 아직도 끙끙대는 김종대와 변백현에게로 다가갔다.
"뭐해. 왜 안 깨워."
"이 사람들 지금 뇌가 죽었어요. 안 들려."
"그럴 땐 걍 때려."
○○○이 솔선수범한다는 듯 정자세로 등짝을 시원스레 휘갈겼다. 그러자 비틀대며 일어난다. ○○이 일단 바깥쪽에 앉은 변백현을 질질 끌고 나갔다. 슬기는 전화를 끊고 막 이 쪽으로 오고 있었다. ○○은 변백현이 자의지로 힘을 요만큼도 주지 않아 더 무거워지는 걸 깨닫고 슬기를 불렀다.
"슬기야."
"네, 언니."
"나 좀 도와줘. 얘 드는 거 좀."
"아 네."
슬기는 ○○을 도와 변백현의 한 쪽 팔을 제 어깨에 감았다. 그래 슬기 이렇게 사근사근하고 착하고… 내가 쓰레기였다. ○○은 다시금 현타를 느끼며 변백현을 끌어내 차에 처박았다. 이 새끼들이 여자애들한테 중노동 시키기는 갑이다. 종인이는 아예 김종대를 업고 왔다. ○○은 김종대를 변백현 위로 겹쳐서 던졌다. 으어억 소리를 내며 변백현이 한 번 꿈틀댔다. ○○은 안 그래도 쑤셔서 죽을 맛인 허리 때문에 할머니 같은 신음 소리를 냈다. 그러자 종인이가 저를 내려다보는 게 느껴졌다.
"괜찮아요?"
"아니. 아 저 사람 같지도 않은 것들…."
"다음부턴 그냥 연습실에서 술 사다 마시라 그래요. 이거 너무 힘들다."
"내가 그 말 이년 째 했어. 먹히지두 않어."
○○○은 내숭이 없었다. 솔직히 그런 걸 잘 못했다. 철벽을 치는 이유는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제 속내를 내놓는 게 싫기 때문이었다. 그걸 치환하면 ○○○은 존나 솔직하다는 뜻도 된다. ○○은 표정을 잘 감추지 못했다. 거짓말을 잘 하는 편이었지만 긴장하지 않으면 표정에 자기 생각이 그대로 쓰였다. ○○은 일부러 무표정하게 종인을 올려다봤다.
"슬기는?"
"걔 엄마가 찾는대서 택시 타고 갔어요."
"나쁘네. 그럼 저것들 뒷처리는 너랑 나랑 다 하는 거잖아."
"네. 뭐 근데… 어쩌겠어요."
"…응. 그래. 나 뒤에 탈까?"
종인은 운전석에 올라타다 말고 정색했다. ○○은 괜히 쫄아서 차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종인은 다시 차에서 내리고 진지하게 말했다.
"누나. 나 싫은 거 아니죠?"
"어? 응. 안 싫은데."
"그런 거면 앞에 타요. 뭐하러 뒤에 타요."
"아니… 그냥…."
그러니까… 말하는데 종인이는 하도 제가 웅얼대서 안 들린 건지 뭔지 쿵 문을 닫았다. ○○은 뒷말을 씹으며 조수석 문을 열었다. 아니, 조수석 또 치워야 된다고… 조수석에 아까 오세훈이 기타 올려놨는데. 문을 열자 종인이 기타를 조심스레 뒷자리로 넘기는 게 보였다. ○○은 자리에 앉고 문을 닫았다. 종인이 안전벨트를 해주려 손을 뻗었는데, 그걸 보지 못한 ○○은 철벽 같이 제가 안전벨트를 뽑아 맸다. 종인은 민망한 손을 괜시리 조수석 창문까지 뻗어 창문을 열었다.
"뭐해. 왜 여기까지 넘어와서 여냐. 운전석에서 열면 되지."
"아, 아. 까먹어서."
"야. 너 면허 없지. 야 너 면허증 까. 나 불안해지는데?"
"아니에요. 진짜 있어요. 미안해요."
○○은 계속 저를 쳐다보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할머니 폰이라는 갤럭시 S3. ○○은 희미한 간판 불빛에 의지해 셀카모드를 키고 립스틱을 꺼내들었다. 브이디엘 립큐브 모이스쳐. 물론 종인은 누나가 립스틱을 바르네, 그랬더니 빨개지네 뭐 그런 생각 뿐이었다. ○○은 냉큼 라디오를 틀었다. 하얀 니트가 털이 날려서 목덜미가 간지러웠지만 티낼 수는 없었다. 뭐라도 들어야지. 나긋한 디제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종인이도 동시에 부드럽게 커브를 돌았다.
"종인아."
"네."
"내일은 연습 없지."
"아마도."
"내일 뭐할 거야?"
"글쎄요…. 그냥 자겠지 뭐."
"나도 뭐하지…"
"할 거 없으면 영화 볼래요?"
"나 영화 싫어해. 머리 아파."
"아… 죄송해요."
대화가 끊겼다. 종인은 무안함과 동시에 이 누나가 날 싫어해서 지금 간접적으로 거부 의사를 표시한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고, ○○은 제가 내뱉고도 병신 같은 대답에 혀라도 깨물까 고민 중이었다. 아까 말한 결혼반지 그 썰은 실제 경험이었다. 좋아하는 남자가 있어도 물질 못하는 게 저였다. 아 진짜 죽어야 되냐… ○○은 그냥 창문에 찰싹 달라붙었다. 쌩쌩, 밤 바람이 찼다. 얼굴에 바람이 부딪히며 부서졌다.
종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누나가 나 싫어하나…. 그렇게 연습실까지 가는 삼십분 동안 정적 가운데에 나긋한 디제이 목소리만 채웠다. 종인은 피곤한 눈을 부비며 연습실 앞에 차를 댔다. 시동이 꺼졌는데 누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자나? 전등을 키고 조수석을 슬쩍 보자 누나는 찌그러지듯 상체를 구기고 자고 있었다. 종인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저러다 어깨에 담 걸릴라. 종인은 ○○의 어깨를 붙잡고 바로 펴 줬다. ○○이 벗어놓은 핑크색 무스탕도 몸 위에 덮어주고, 창문도 다시 닫아줬다. 그러고도 추울까봐 제 코트까지 위에 꼼꼼히 덮어준 종인은 다시 웃었다. 아 너무 귀엽다.
종인은 제 핸드폰ㅡ아이폰 6+ㅡ에 오직 누나를 도촬하기 위해 깔아둔 무음 카메라로 몰래 ○○을 찍었다. 그리고 사진이 잘 저장되었는지 확인한 후, 다시 또 웃었다. 저 사람들을 내가 다 날라야 하는 건 좀 힘들겠지만, 누나의 사진을 얻었으니 됐다. 종인은 오늘 비록 데이트 신청은 까였지만 충분한 소득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종인은 다시 웃었다. 이렇게 조울증 걸린 사람처럼 웃는 것도 짝사랑 때문이다. 다.
* * * * *
정말 다시 말씀드리지만 가볍게 읽어주세요..
그리고 여러분 다 기억해요! ㅋㅋㅋㅋ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