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w.로스트
“그렇게 인사도 없이 가버리는 게 어딨어.”
그날 이후, 다시는 태형을 만나지 못 할 거라 생각한 여주였다. 정말 한 여름밤의 꿈, 딱 거기까지였으리라 생각된 하룻밤이었으니까. 하지만 버스정류장에 덩그러니 앉아있던 여주의 앞으로 멈춰 선 검은 외제차 한 대. 창문이 내려가고 그 안으로 보이는 사람은 분명한 태형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함께 춤을 춰본 사람. 비싼 양주에 취해서인지, 아님 그날 밤의 분위기에 취해서인지 여주가 저도 모르게 제 속 사정을 속절없이 드러내버린 사람.
“...오늘은 라이터 없어요.”
“라이터 빌려달라고 온 거 아니야.”
“......”
“그냥 보고 싶던 얼굴이 보이길래 온 거지.”
여주가 놀란 감정을 숨기기 위해 애써 말을 돌리며 능청을 떨어보았으나 그마저도 소용없었다. 태형은 단단히 섭섭하단 표정을 짓고 있었고 여주의 말을 받아치는 태형의 목소리 톤 또한 한껏 서운함에 뒤틀려있었다. 곧 마을버스의 막차가 도착할 터였다. 그 막차를 놓친다면 여주는 다섯 정거장 정도 거리의 어두운 밤길을 홀로 하염없이 걷게 될 것이 분명했다.
“...저번에 빌려 준 라이터 내 방에 있는데.”
“다시 받으러 안 올래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제 손톱 옆의 연한 살 만을 깔짝거리는 여주를 보며 태형이 넌지시 물었다. 섭섭함이 앞섰음에도 불구하고 여주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 마치 부탁처럼만 들리는 태형의 목소리였다. 여주의 손장난이 멈추고 짧은 정적이 이어졌다. 여주가 고개를 들어 태형과 눈을 맞췄다. 사실 여주는 그딴 라이터 하나쯤은 돌려받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게다가 그날 밤 김 씨의 손 떼가 탄 라이터였으니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그 라이터는 태형에게 그저 작은 변명거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여주는 이미 알고 있었다. 태형의 눈에 담긴 다른 의도가 너무도 뻔히 보여서. 그래서 여주는 애써 모른 척 순순히 그의 의도에 속아 넘어가 줄 수 밖에 없었다.
-
“나랑 있자, 오늘.”
“......”
“응? 여주야.”
태형은 오늘이 여주의 아버지가 돌아오는 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저렇게 혼자 집에 있는 것이 무서워서 싫다는 말도 안 되는 투정으로 여주를 붙잡아 둘 심상인 게 분명했다. 1층의 테라스 한 편에 있는 풀장에 발을 담근 채로 발끝을 찰랑이던 여주가 제 옆에 놓여있던 스파클링 불꽃 하나를 집어 들었다. 라이터의 불이 스파클링의 끝자락에 닿으며 치지직, 하고 따끔한 소리를 냈다. 금방이라도 여주에게 튈 듯이 톡톡 터지던 불꽃은 빠르게 타들어갔다. 여주는 그 불꽃의 심을 바라보며 태형을 처음 만나던 날, 자신을 이 저택까지 이끌었던 하늘 위의 그 환한 불꽃들을 떠올렸다.
“날 이렇게 도와주는 이유가 뭐예요?”
“......”
“그냥 불쌍해서?”
그날 하늘로 터져 오르던 화려한 불꽃이 지금은 마치 여주 제 손에 고스란히 쥐어진 것만 같았다. 그날도, 오늘도. 태형은 매번 여주가 꿈꾸던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이뤄내 버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여주는 문득 궁금해졌다.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게 될 후계자라는 타이틀 탓에 밖으로 얼굴을 자주 내비치진 못했던 태형이었지만 정이 많은 이미지의 사람이라는 건 이미 태형의 주변 지인들을 통해 모든 매스컴에 알려져 있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남이나 다름없는 자신에게까지 이런 매너와 배려를 베푸는 이유가 대체 뭘까.
“도와주는 거라 생각해본 적 없어.”
“......”
“그냥 너를 어두운 곳에 두고 싶지 않아.”
그뿐이야.
스파클링 불꽃이 빠르게 막바지를 향해 타들어가고 있었다. 태형과 단둘이 파티를 즐겼던 그 다음날, 소파 위에 누워 불편하게 잠이 든 태형의 얼굴을 보고도 여주는 그저 조용히 저택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여주에겐 결국 돌아가야 할 현실이 있었고, 그 현실은 태형이 있는 이곳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으니까.
김 씨가 일터로 내려간 뒤, 여주는 난장판이 된 집안을 정리하고 평소와 같은 일상으로 돌아왔다. 다만 이마에 붙은 대일밴드를 볼 때마다 자꾸만 태형의 얼굴이 떠올라 조금 힘이 들었을 뿐이었다. 그래도 나름 그 하룻밤의 기억을 좋은 추억으로 남기려 애를 쓰던 여주였는데 그런 여주를 자꾸만 뒤흔든 것이 대일밴드 말고도 딱 하나가 더 있었다. 그건 바로, 파티 때문인지 간간이 창문 너머 태형의 저택 위로 터져 오르던 불꽃이었다.
“...그게 동정이라는 거예요.”
점차 작아지던 스파클링의 불꽃이 마침내 온전히 사라지고 쾌쾌한 탄내만을 남겼다. 태형이 말없이 고개를 돌려 여주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정말 동정인 걸까. 난 겨우 그 단순한 동정심 하나 때문에, 당신을 위해 매일 밤마다 하늘에 불꽃을 쏘아 올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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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도 태형은 몇 번이고 여주를 찾아왔다. 여주의 일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버스정류장으로 줄곧 여주를 데리러갔고 김 씨가 집에 돌아오는 날이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 여주를 놓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말마다 김 씨를 피해 태형의 집에서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여주는 매번 태형을 달래야 했고 아버지에게 맞지 않겠다 약속해야 했으며 주말이 지난 후엔 여주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는 태형에게 순순히 잡혀있어야 했다.
“과하다고 생각 안 해요?”
“뭐가?”
“지금 나한테 이러는 거요.”
여주의 양 볼을 감싸곤 제 큰 눈을 도록도록 굴려 보이는 태형을 보며 여주가 밉지 않게 인상을 구겼다. 그리곤 태형의 손목을 붙잡아 밑으로 내리며 태형에게 잡혔던 제 볼을 쓸어내렸다. 안 맞았다니까 그러네.
“걱정 되잖아.”
“그니까요. 그 걱정이 너무 과하다고, 우리 사이에.”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한 투로 말하는 태형을 지나친 여주가 소파 앞 테이블에 놓인 냉수 한 잔을 들이켰다. 분명 이쯤 되면 탁구공처럼 여주의 말을 받아쳤어야 할 태형이었는데 이상하게도 텀이 길었다. 여주가 비워낸 컵을 다시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멀뚱히 제 자리에 서서 자신을 보고 있는 태형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표정 없이, 건조하기만 한 태형의 눈이 여주의 눈과 단번에 부딪혔다.
“우리 사이가 뭔데?”
그리고 마침내 날아온 태형의 물음이었다. 장난스레 한 말이었으나 예상치 못하게 태형의 표정이 너무도 진지한 것이 문제였다. 소파에 앉아있던 여주의 곁으로 태형이 서서히 걸음을 옮겨 다가왔다. 두 사람 사이로 괜스레 긴장감이 감돌았다.
“대체 어떤 사이가 되어야만, 이런 과한 걱정도 이해가 되는 건데.”
여주의 옆에 앉은 태형이 여주의 허리 뒤로 손을 짚으며 여주의 얼굴 가까이로 제 얼굴을 밀착해왔다. 여주의 눈이 크게 벌어지고 그런 태형의 얼굴이 여주의 눈 속으로 한가득 들어찼다.
“여주야.”
“...윽.”
“이거 뭐야?”
그리고 그 순간, 별안간 태형이 붙잡은 건 여주의 왼쪽 어깨였다. 여주가 입고 있던 티셔츠의 어깨 부분이 조금 흘러내려 여태 잘 숨겨왔다고 생각했던 여주의 검붉은 멍이 결국 태형의 눈에 들어오고 만 것이었다. 여주가 반사적으로 옅은 신음을 내뱉으며 한쪽 눈가를 찡그렸다. 비스듬히 여주의 어깨에 향해있던 태형의 시선이 그런 여주의 얼굴로 다시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별거,”
“또 별거 아니라고 그냥 넘길 생각 하지마.”
난 그렇게 생각 못하니까.
태형의 목소리에 단단한 분노가 박혀있었다. 처음 여주가 아버지에게서 폭력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에도 곧장 경찰에게 신고 전화를 넣으려 휴대폰을 집어 들었던 태형이었다. 하지만 김 씨는 어쩔 수 없는 여주의 아버지였고, 무엇보다도 여주는 일이 커지는 것에 대한 불안감에 겁을 먹고 있었다. 나만 좀 참으면 된다고, 그렇게 여태 버텨왔던 것이었다. 그런 여주의 겁먹은 얼굴을 보면서까지 신고를 넣을 순 없었던 태형은, 대신 여주에게 몇 가지 약속을 받아냈다. 참지 않겠다고. 반항은 못하더라도 한번 더 그런 일이 생긴다면 자신과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즉각 자신에게 달려오겠다고.
하지만 여주는 결국 그러지 못했다. 여주가 태형의 시선을 피해 흘러내린 옷을 추켜올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주야. 태형이 그런 여주를 다시 한번 불러 세웠다. 우리 사귈까? 갑작스런 태형의 고백이었다.
“동정이라고 했지.”
“......”
“근데 내가 보기엔 아니거든, 동정.”
목소리부터 표정, 모든 것에 태형의 확신이 가득 차있었다. 매번 장난으로만 여주를 붙잡던 태형은 더이상 없었다. 동정이 아니란 것을 알았고, 여주의 상처를 이렇게 또 한번 마주한 이상 태형은 더 강력히 여주를 보내고 싶지 않다는 욕구를 느꼈다. 첫 만남 때 여주에게서 보았던 이마 위의 그 생채기. 딱 그 정도까지가 태형의 한계였던 셈이었다.
“...장난이라면 여기서 그만둬요.”
여주의 목소리 끝이 조금 떨려오고 있었다. 여전히 태형에게 등을 돌린 채라, 그런 여주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 말을 하면서 너는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태형이 속으로 그렇게 물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여주의 허리를 뒤에서 감싸 안았다. 그리곤 아까 보았던 피멍이 든 여주의 어깻죽지에 기꺼이 제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언제부턴가 넌 항상 같이 있었어.”
“......”
“내 상상 속에, 모든 결심에.”
“근데 어찌 장난일 수 있겠어.”
여주는 태형에게로 와 꽃처럼 피어났다. 말간 얼굴이 볼수록 예뻤고, 매번 무심하기만 하던 얼굴에 가끔씩 꽃봉오리가 터지듯 퍼지는 미소는 태형을 멍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평생을 화려한 장미만 보고 살아온 제게 여주는 참으로 수수한 안개 꽃 같은 사람이었다. 태형이 조심스레 여주의 몸을 돌려 여주와 시선을 맞췄다. 역시나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눈을 한 여주의 얼굴이 보였다. 충분하다 못해, 과분한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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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쪽 딸내미 요즘 연애해?”
김 씨의 옆에 서있던 박 사장이 창살 안의 개들을 보며 대뜸 꺼내온 말이었다. 이리저리 서로를 물고 뜯는 투견들에 목을 빼고 있던 김 씨가 그런 박 사장의 말에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곧장 고개를 돌려 박 사장을 바라보았다. 매번 가게 앞에 버스정류장까지 웬 사내놈 하나가 데리러 오던데.
“뭐야. 진짜 몰랐어?”
박 사장의 말 끝으로 컹, 하고 개 짖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적잖이 굳은 표정을 내비친 김 씨가 그게 정말이냐며 박 사장을 향해 여러 번 반복해 물었다. 아, 글쎄 내가 똑똑히 봤다니까? 심지어 차도 번쩍번쩍 한 게, 일반 평범한 놈은 아니었어. 마치 대단한 비밀이라도 속삭이듯 김 씨의 어깨를 제 팔꿈치로 툭 쳐 보이며 말하는 박 사장에 김 씨의 얼굴 위로 마침내 싸늘한 냉기가 돌았다. 물어! 놓지 말고 물라고! 주변 사람의 환호성 섞인 목소리가 김 씨의 귓속을 계속해서 파고들었다. ...어쩐지 요새 자꾸 집이 비더라니.
“괘씸한 년.”
김 씨가 까득, 이를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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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편은 화요일 밤 10시에 들고 오겠습니다.
진짜 이번에도 급전개에 내용 너무 구리네요
작가님들과 독자님들께 면목이 없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