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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소년단] '느낌의 공동체' 2ND PROJECT [세번째.난희-下] (完) | 인스티즈

[방탄소년단/정호석] 난희 下 (完)



W.교수






 그래.나는 아버지를 증오하게 됐어요.5년 전에 어머니가 폐병으로 돌아가시게 되면서부터 아버지는 변했어요.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겁니다.조국에 몸을 바치겠다고 한 건 다 어머니를 위한 입에 발린 거짓말 뿐이었고, 실은 돈과 재산이 가장 우선인 이기적인 사람이었던 거예요.어머니가 돌아가신 그 다음 해에, 아버지는 일본인에게 성을 팔고 나와 내 누나의 일본 이름을 지어왔어요.앞으로를 정호석 대신 타카히로로 살아가야 한다고.그러지 않는다면 더 이상 자신은 나의 아버지가 될 수 없을 거라더군요.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대들고, 악을 썼습니다.그리고 아버지도 처음으로 내게 손찌검을 했어요.우리는 똑같이 마주보고 울었지만, 아마 그 눈물의 이유는 달랐을 겁니다.


 "나는 나를 그렇게 거두고, 만들고, 키워낸 사람에게 버림 받은 것에 지독한 배신감을 느꼈어요."
 "…나였어도 그랬을 거예요.그랬을 수 밖에 없었을 거예요."
 

  난희는 호석의 어깨를 감싸안았다.넓고 든든해보였던 그가 그녀의 품에 가득 안겼다.

호석은 소리 없이 울음을 삼켜내며 난희의 어깨를 적셨다.난희의 작은 손이 그의 등을 토닥였다.난희는 진심으로 호석을 동정했다.


 "…난희씨."
"네, 호석씨.듣고 있어요."
 

 그녀의 몸을 타고 호석의 목소리가 웅웅 울려퍼졌다.애매하게 난희의 어깨죽지에 얹어져 있던 그의 손이 등허리를 꽉 껴안았다.

난희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가 무슨 부탁을 해올지 알고 있었다.그리고 기꺼이.그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었다.


 "…나를 겁쟁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나는 당신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
 "호석씨같은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아요.그리고 그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 일 뿐이고."
 "……."
 "당신은 나를 처음으로 설레게 했고, 처음으로 내 진심을 내어주고 싶어진 사람이야.그러니까 나는 호석씨를 위해서 기꺼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게요."


나를 믿어주세요.처음 만났을 때처럼 난희는 호석의 소매를 걷어 얇은 그 손목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녀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던 호석이 결심을 한 듯, 난희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나직히 입을 열었다.


 "…우리 아버지를,"
 "……."
 "죽여주세요.난희씨."


 그 부탁에 난희가 할 수 있는 일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 뿐이었다.



///



 "이시즈카의 둘째 도련님 알아?"
 "이시즈카?"


 달칵.소음기에 닫힌 총성이 안으로 먹혀 들어갔다.다음 사격을 위해 총알을 장전하던 난희의 시선이 과녁에서 멀어져 아까부터 제 관심을 돌리려는 정국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눈썹 사이가 일그러졌다.또 어디서 이상한 얘기를 주워들어 와가지고.정국은 난희의 매서운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작게 웃었다.


 "암살 의뢰 했대.준 형한테."
 "……상대는?"
 "당연히 아버지겠지."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는 정국이었다.더 얘기해봐.한쪽 눈을 찡그려 가늠쇠에 초점을 맞추어내며 그녀가 물었다.


 "글쎄.내가 들은 건 그게 단데."
"…진짜로?나 걸 수 있냐?"
 "궁금하면 형한테 가서 물어보던지."


정국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아쇠가 당겨졌다.타앙.눈 깜짝할 새에 과녁 정중앙에 여섯번째 구멍이 뚫렸다.

난희가 숙였던 몸을 일으키며 정국을 다시 돌아봤다.총구가 바닥을 향하며 그녀의 긴 치맛자락에 감겼다.

그 아래로 발목에 검은 나비가 아른거렸다.정국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쪽에 가서 꽂혔다.


 "너 내가 그 집안에 관심 많은 거 알지."
 "…지금 반응만 봐도 알겠다."
 "아는 거 싹 다 말해.나랑 계속 좋은 누나동생 하고 싶으면."


 웃음기가 남아있던 정국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난희의 눈빛, 말투, 행동 그 모든 것에 예민한 그였다.

그녀를 알아온게, 사랑해온 게 가히 짧은 시간이 아니었음을 드러내는 증거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단순히, 난희가 이시즈카에 갖는 관심이 고작 동정심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해.동족을 향해 총구가 겨눠지고, 탄피가 난무하는 전쟁판에서 도망쳐나온게 고작 일곱살 때였다.

한순간에 전쟁 고아가 되어버린 그녀를 다행히도 가여이 여겨 거둬준 군인 덕에 그녀는 삶을 연명할 수 있었다.

병사들이 머무르던 임시 기지에는 난희와 같은 아이들이 많았다.그 중 하나가 정국이었고, 낯선 사람들 통에 겉돌던 그를 친동생처럼 챙긴 것이 그녀였다.

둘의 사이가 친남매처럼 가까워지게 되는 것은 당연했다.

 
 열다섯이 되었던 해의 중간, 그 어느 쯤의 새벽.끊임없이 이어지던 전쟁이 잠시 그친 그때가 기회였다.난희와 정국은 달을 삼킨 강을 건넜다.

일제의 독재가 판을 치는 제 고향으로 향하면서도 그들은 행복에 겨워 자꾸 웃었다.허리 아래가 전부 강물로 푹 젖어 무거워진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국경을 넘어서 대한제국의 땅을 밟고, 그간 군인들의 일을 도와 조금씩 모아두었던 돈을 합쳐 경성 변두리의 마을에 터를 마련했다.

다행히 상해의 전쟁터에서 건너온 어린 두 남매를 수상히 여기는 어른이 없어 그들은 새로운 생활에 빠르게 적응해갔다.


 그들이 남준을 만났을 땐 난희가 열일곱이었다.근처 보통고등학교의 가쿠란 제복 차림을 한 남준이 그녀와 정국의 집에 먼저 찾아온 것이 그들의 첫만남이었다.

너희 소식 많이 들었어.듣기로는 군인들 손에 컸다지?초면에 이런 부탁해서 정말 미안한데, 난 지금 총을 쏠 줄 아는 사람을 찾고 있거든.

난희가 예의상 내온 보리차를 사이에 두고 건너온 낯선 이의 말은 익숙한 것들이었다.그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은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 날 이후로 남준은 매일 같이 둘의 집에 들러 설득하기에 열을 올렸다.그는 체계적인 문무력 독립 집단을 만들고 싶어했고, 그 과정엔 난희와 정국이 꼭 필요하다고 했다.남준이 찾아온지 꼭 열흘만에 두 사람은 남준의 뜻을 따르기로 결정했다.열 번의 새벽 동안 수도 없이 오고 간 의견 끝에서 나온 결론이었다.


 남준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난희와 정국은 그와 함께 바다를 건너 대만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남준의 또 다른 동료였던 윤기를 만났고, 넷은 비밀독립단체 팻말을 걸고 일본인 및 친일 암살의뢰를 받으며 그들만의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의뢰를 받고 계획하고 실천에 옮길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남준과 윤기의 일이었으며, 실전에 투입되어 여러 가짜 신분 역할을 해내어가며 암살을 하는 것이 정국과 난희의 일이었다.


 난희가 무용가로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도 개중의 하나였다.손쉽게 그녀에게 마음을 내주었던 일제의 모 영화사 사장이 무명의 무용가였던 난희를 위해 성대하고도 사치스러운 무대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 그것이었다.

 난희가 유명해진 건 그녀와 동료들에게 양날의 검이 되었다.방아쇠를 당기는 것보다 나비처럼 움직이는 것을 더 좋아하던 난희에게는 기회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본인과 본인의 사람들의 정체를 공개적으로 처형하는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녀는 그 공연을 마치고 임무대로 표적을 성공적으로 암살했다.그리고 당연히 원래의 제 삶으로 돌아오기 위해 홀연히 종적을 감추었다.

허나 꿈을 꾸는 것을 멈추는 것은 스스로의 의지로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었던 탓에 처음으로 마음에 병을 얻었다.차마 무대 위에서 느꼈던 그 자유를 잊지 못했던 것이 연유였다.

그 재능을 안타깝게 여긴 건 난희 본인 뿐만이 아니었다.남준은 난희가 저들 때문에 숨어 지내야 하는 것을 마땅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저의 꿈을 위해 그녀는 이 일에 헌신하고 있었다.그것은 정국도, 윤기도 마찬가지였다.


 그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의 꿈을 밟아 뭉갤 자격은 없거든.그들이 택한 건 독배를 기꺼이 달게 마시는 것이었다.

독배를 마시는 순간 더 이상 예전같은 일은 반복될 수 없다.예전의 평범한 삶은 소멸된다는 걸 다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더욱이 진행되어야 할 일이었다.난희는 남준과 윤기의 도움으로 한 달 만에 다시 무대를 설 수 있게 되었다.

동경에서 가장 크게 열리는 선수권 대회였다.그녀는 보란듯이 다시 찾아온 기회를 낚아챘다.전과 달리 가짜 신분으로가 아닌 진짜 무용가가 되어 춤을 추었다.

다시 사람들의 이목을 모으는 건 어렵지 않았다.그 일은 난희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으니까.


 "근데 누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기 일주일 전이었다.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싶었지만, 남준은 다들 기다렸을 거라며 귀환식 준비에 한창이었다.

일본을 돌며 공연을 마치고 오랜만에 돌아온 집에서 그녀는 근처를 산책하거나, 혹은 거실에서 남준이 읽던 신문을 읽거나, 윤기가 시키는 자질구레한 일들을 했다.

그러다가 그것들 마저 모두 싫증이 나면 지금처럼 지하실로 내려와 사격 연습을 했다.

총을 놓은지 오래 되었지만, 총구의 서늘함은 언제든지 저를 찾아주기를 기다려왔던 것처럼 그녀의 손에 익숙하게 감겨들었다.

 
 "내가 거절했어."
"뭐?"
 "남준 형도 동의했어.지금 경성이 이시즈카 앞마당이라서 조금이라도 실수했다간 목에 줄 그어지는 거 한 순간이거든."
 

 난희도 여느 다른 사람들처럼, 이시즈카의 악명은 귀에 박히게 들어 알고 있었다.신문에서든 주변에서든 가장 자주 들리는 게 그 집안의 이야기였다.

재산을 총독부에 팔아넘긴 수장 오다와, 베일에 둘러싸여 정체가 불명한 그 둘째 아들 타카히로.

그리고 그녀는 이상하게 그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아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그가 남준에게 제 아버지를 의뢰했다는 것은 분명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은 무언가의 이야기가 더 있으리라.

 
 "국아."
 "왜."
 "지금 남준이 어딨어?"
 

  난희가 총을 다시 원래 걸려있던 벽에 걸어두며 물었다.의자 등받이에 턱을 괴고 앉아있던 정국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 형이 갈 데가 서재 아님 옆 전당포 밖에 더 있어?정국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난희는 성큼성큼 윗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았다.

그녀의 단호한 뒷모습에서 좋지 않은 기운을 감지한 정국이 뒤늦게 난희의 이름을 불렀을 때는 이미 문이 닫히고 난 후였다.


 "아…진짜 누가 말려."


 난희는 꼭 제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에서 정의감이 불타오르곤 했다.정국은 걱정 어린 한숨을 푹 내쉬었다.




///




 서재의 문이 노크도 없이 벌컥 열렸다.아, 깜짝이야.투고글을 써내려가고 있던 남준이 화들짝 놀라며 돌아본 곳에 미묘하게 굳은 표정을 한 난희가 서있었다.

들어올 때 기척 좀 내라니까.애 떨어지겠다.툴툴거리는 남준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순식간에 책상 앞으로 걸어와서 남준의 공책 위에 손을 턱 하니 얹는 그녀였다.

남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얘가 왜 이래?


  "부탁 하나만 하자."
 "뭔데 이렇게 비장하기까지 하냐."
 "나 귀환식 하는 거 기사 좀 1면에다 크게 내주라.돈 좀 써서."
 "뭐?"


 남준은 어안이 벙벙했다.너무 신경 쓸 거 없다고 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그의 의심의 눈초리에도 아랑곳 않고 난희는 제 의견을 박박 밀어댔다.

알겠지?저번에 나고야에서 찍은 사진도 대문짝만하게 좀 넣고.부탁한다 남준아.난희는 그가 대답할 새도 없이 등장할 때처럼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다시 혼자 서재에 남은 남준은 뒷목을 긁적대다가 그냥 그녀의 변덕에 익숙해지기로 결론을 내렸다.

쟤가 저러는 거 한두 번도 아니고, 내가 적응해야지.난희의 요구대로 신문 1면에 기사를 내기 위해 전화기를 들며 그런 생각을 하는 남준이었다.



///



 이시즈카의 응접실은 과도하게 사치스럽고 웅장했다.과장을 조금 보태어 얘기하면 황제의 식탁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긴 식탁 가운데에 유카타를 입은 오다가 앉았고, 그 왼쪽과 오른쪽에 호석과 난희가 자리했다.

하인들은 바삐 그들의 사이를 오가며 식사 준비를 하였다.단정하지만 고고한 멋을 품은 탁한 황갈색의 저고리를 여미며 난희는 수줍게 웃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그 어떤 실수도 빈틈도 용납 되지 않는다.그녀의 손짓 하나 행동 하나에 모든 것이 결정 되는 것이었다.


 "무대 위의 아가씨는 굉장히 대담하고 당찬 여성으로 보였소만, 지금은 그 어떤 여인보다 조숙하고 얌전한 기색을 갖추고 있군요.

타카히로가 왜 아가씨를 눈에 담게 됐는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렇지만도 않아요.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다는 심미적인 것을 요히 여기는 사내였고, 그의 미적인 기준에 난희는 당연히도 보통 그 이상이었다.

그러한 탓에 오다는 난희가 부모가 별 볼 일 없는 전당포 주인이며 춤실력과 수려한 외관 말고는 내세울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호의적일 수 밖에 없었다.게다가 조신하고 예의 바른 태도가 난희를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난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가는 법을 알았다.그간 쌓인 경험에서 얻은 내공이었다.

특히나 오다같은 중년의 남성들이 무얼 좋아하는지, 어떤 부분에서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평소에 대화도 오가지 않던 두 부자의 식사 자리가 그녀 한 명으로 인해 180도 뒤바뀌었다는 것에 호석은 내심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접시가 어느정도 비워지고나니, 술과 함께 했던 식사였던지라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호석을 제외한 두 사람은 취기가 올라 있었다.

술에 취해 기분이 좋아진 오다는 호석에게 난희의 칭찬을 늘어놓았다.

타카히로, 이런 아가씨와의 혼인이라면 나는 당연히 허락한단다.분명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네게 도움이 될만한 여인이다.

호석은 어색하게 씩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가오는 자정에 불안에 떨고 있는 터라 그 어떤 말도 귀에 와서 박히지 않았다.


 "아니,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군요.우리 집의 개인 기사까지 퇴근해서 데려다 줄 방도가 없으니 그냥 오늘 하룻밤은 여기서 머무르는 것이 어떻겠소?"
 "늦은 시간에 이리도 배려를 해주시니 저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허나 타카히로씨가 앞으로 저의 주군이 될 분이시니, 그 의견에 따르겠습니다."


 계획은 난희의 생각보다 술술 풀려나가는 중이었다.술에 취하여 모든 경계를 푼 표적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누는 것은 토라진 정국의 마음을 달래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호석의 긍정의 의사가 떨어지자 오다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에서 부리나케 달려온 하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오다는 제 방으로 올라갔다.

오다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끈기 있게 상체를 숙이고 있던 난희가 고개를 들었을 때, 호석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방을 안내해줄게요.따라와요."


 마주친 호석의 눈에서 슬픔을 느꼈다.난희는 그를 모른 체 하려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그의 어깨 너머로 던졌다.

호석이 등을 돌려 먼저 응접실을 빠져나가는 동안, 난희는 제 치마 아래 허벅다리에 묶여있는 칼 한 자루를 만지작거렸다.



///




"불편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문 옆에 호출벨을 눌러서 하인을 부르세요.뭐, 그럴 일은 없겠지만…."


 객실로 쓰고 있다는 방은 쾌적하고 아담했다.호석은 괜히 잘 정리된 침대보를 의미없이 탁탁 두드려보기도 하고, 창가를 어슬렁거리기도 하며 그녀의 앞에서 불안한 기색을 여지 없이 비추었다.

난희는 문 앞에 서서 달빛으로 가득 찬 방 안의 호석을 주시하고 있었다.빚어낸 듯한 옆얼굴이 천천히 돌아서 그녀와 정면으로 눈을 맞추었다.

그제야 가만히 그를 보고 듣고만 있던 난희는 발을 움직여 호석의 앞에 멈추어 섰다.

그녀는 무엇이든지 그를 위해주고 싶었다.이토록 누군가를 위해서 살고 싶은 마음은 정국에게 느끼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난희씨,"
 "우리…도망 갈까요, 호석씨?"


 난희가 쥔 제 손을 내려다보다, 이윽고 다시 호석은 그녀를 봤다.그 어느 때보다 그의 눈은 마음을 비추지 못할만큼 요동치고 있었다.


 "내가 오늘 밤 오다를 죽이면, 제일 먼저 의심을 받게 되는 건 당연히 당신일 거예요."
 "……."
"그동안은 내 뒤에서 나를 도와주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이번은 나 혼자서 내 멋대로 하는 거라 위험하지 않다고 장담할 순 없어요.그치만,"
 "나한테는,"

 "……."

 "나한테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잖아요…당신이 위험해진다고 말해주지 않았잖아요."

 
 당신의 동료에게 처음으로 의뢰를 했을 때,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적임자가 없다고 했어요.분명 억지로 맞지도 않는 부자연스러운 계획을 세웠다간 당장에 탄로나고 말 거라면서.

나같은 겁쟁이가 할 수 있는 일은 당신같은 사람들을 믿는 것 뿐이었는데, 거절 당하고 나니 삶의 목적을 잃은 것 같았고, 그 탓에 나는 나의 존재에 대해서까지 불신하며 지냈습니다.그러다가 신문에서 기적처럼 난희씨를 봤고, 난희씨의 발목에 있는 나비 문신을 봤어요.

다른 사람들은 그저 미의 목적으로 새긴 것이라 생각했겠지만, 나는 알아볼 수 있었어요.내가 직접 의뢰를 넣었던 독립 단체의 상징이었으니까요.



 "그러니까 같이 도망가자구요."
 "……."
"더 이상 죄책감에 빠져 살 필요 없어.나도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니까."


 나를 믿어달라고 했잖아요.괘종 시계의 짧은 바늘이 어느덧 12와 가까워졌다.

호석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쥔 손에 더 힘을 주었다.눈물이 고인 눈을 감추지 못하며 그는 쓰게 웃었다.

마침내 초침이 11을 지나쳤다.난희가 호석의 손을 놓았다.


 "30분 후에, 뒷문에서 만나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들의 입맞춤이 마지막이 아니길 바랬다.



 ///



 부욱.강한 악력에 의해 치마가 찢겨나갔다.발목에서 펄럭거리던 치맛단이 무릎 위에서 너덜거렸다.그녀는 그마저도 허벅지 옆으로 단단히 묶어내고, 찢긴 치마 원단은 손목에 단도와 함께 묶였다.지문 자국 하나 없이 투명한 유리창을 넘어온 달빛에 오다의 방문 앞으로 난희의 그림자가 졌다.방 안에서는 나즈막히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름칠을 해놓은 문은 소리 없이 열렸다.이제까지 해왔던 그 어떤 실행보다 수월하고도 대담한 잠입이었다.아마 하인들도 늦은 시간까지 그의 시중을 드느라 피곤한 탓에 경비를 소홀히 하고 있을 거라 예상했다.그녀의 하얀 발이 자줏빛 카펫을 지나 침대 가에 멈췄다.오다는 기척을 느끼기는 커녕 뒤척거리지도 않으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망설이는 순간 모든게 끝이 난다.손목에 묶여있던 단도를 빼낸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30분.30분 뒤면 모든게 끝이 난다.호석과 함께 마차를 타고 이 집을 빠져나가 경성역으로 향할 것이다.그리고 새벽 기차에 올라 어디로든 향할 것이다….그녀는 고개를 숙였다.독한 알코올 냄새가 그녀의 후각을 잠식해왔고, 이어서 그녀의 메마른 입술은 꺼슬하고 축축한 오다의 입술을 덮었다.


 단도가 간단하게 목 한 가운데를 파고 들었다.고통에 번뜩 뜨인 사내의 눈은 영영 감기지 않았다.



///



 여기.옆 동네로 이어지는 길목에 위치한 양담뱃집.

평소보다 일찍 장사를 접은 인력거꾼 김씨, 장씨는 허겁지겁 반쯤 열린 덧문 밑으로 몸을 밀어넣었다.

미리 와 둘러 앉아있던 기생과 아낙들의 시선이 일제히 돌아갔다가 다시 흩어졌다.

두사람은 자연스레 주인에게 담배를 건네 받으며 막 오고가고 있던 이야기를 경청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범인은 잡았대?"
"잡긴 뭘 잡어.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는데도 누군지 털끝 하나 모른대잖아.쯧쯔, 무식한 일본놈들 같으니라구."
 "어허.누가 들으면 어쩌려고.말 조심 하시게."
 

 이시즈카 오다가 살해 되고, 그의 둘째 아들인 타카히로가 종적을 감췄다는 이야기는 세간을 떠들썩하게 뒤흔들었다.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그 이야기에 대해 수근덕 댔고, 이시즈카 저택 앞은 늘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보기 위해서 모여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범인에 대한 추측과 소문은 수만가지로 난무했지만, 역시나 정확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조금 더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얘기에 귀를 기울이며 의미 없는 이야기를 나눌 뿐이었다.


 "내가 볼 때는, 아비한테 증오심을 품고 있던 그 타카히로가 범인이 아닐까?앞뒤도 딱 맞는 거 같은디."
 "이 사람아.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구만?그 집 하인들이 하나같이 입 모아서 타카히로는 밤새 자기 방에 있는 걸 봤다고 증언했어야."
 

 한 아낙의 톡 쏘아붙이는 말에 방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담배 연기가 조금 더 자욱해졌을 때, 장씨가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뭐가 어찌 됐든, 잘 된 일이야."
 

 그 말에는 너도나도 공감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중요한 것은 오다를 죽게 만든 범인의 정체가 아니라는 것 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아참, 그럼 그 혼인은 어떻게 됐대요?"
 "맞아 맞아.그 난희라는 아가씨하고 혼인한다고 한동안 떠들썩하더니."
"여기저기서 주워 들은 바로는 여 조선 땅에 없는 모양이여."


 김씨가 재떨이 위에 다 타들어간 담배를 톡톡 두들기며 말했다.

또 그녀가 한국 땅을 뜬 이유에 대한 무근거한 추측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지만 역시나 그것을 믿는 이는 없었다.


 "뭐,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겠지.원래 잘난 놈들은 끼리끼리 어울리는 법이니까 말여."


그들이 이런 저런 소문에 대해 떠드는 사이, 하늘이 비라도 쏟아낼 것처럼 우중충해졌다.곧 비가 올 것 같네.

장씨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하늘로 옮겨갔다.그러네.비가 오기 전에 그럼 우리 이만 일어나세.방 안의 담뱃불이 모두 꺼지고 사람들이 차례대로 가게를 떠났다.

마지막으로 불을 끄고 덧문을 내린 담배집의 주인도 골목 뒤로 사라지고, 소란스럽던 골목에 고요함이 찾아들었다.


 한방울 두방울.이윽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

다음부턴 저한테 이런거 시키면 안 된다는 것을 아셨을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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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뷔땀눈물
6년 전
독자6
작가님 다음 얘기는 없나요?! 너무 재미있어요 ㅠㅠㅠ 다시한번 이런 영광스러운 릴레이를 만들어주신 시집작가님에게 뽀뽀를...❤️ 호도기도 너무 아련해욤 ㅠㅠㅠ
6년 전
독자2
호석이ㅠㅠㅠㅠㅠㅠ
6년 전
독자3
초코에 빠진 커피에요
아ㅠㅠㅠㅠㅠㅠ
마음한구석이 아련하네요

6년 전
독자4
ㅠㅠㅠㅠㅠㅠ호석이랑 난희 ㅠㅠㅠㅠㅠ 아련해요 완전
6년 전
독자5
[막냉꾹]
암살하고 호석이랑 여주가 무사히 빠져나가서 다행이에요 저는 둘이 어느 정도 행복하게 살 거라고 생각하겠습니다 ㅠㅠ

6년 전
독자7
햄버거입니다
비오는날 좋은비지엠과 좋은 글을 읽으니 마음이 차분해지는거같아요 마음한구석이 짠해지는거같아요 지금 비오고 모든상황이 잘어우러져서그런가 더 몰입잘된거같아요

6년 전
독자8
민슈가천재짱짱맨뿡뿡 이에여
대박... 아니 진짜 대박인데요....!
브금이랑 글도 너무 잘 어울리고 필력 대박... 난희랑 호석이가 하는 행동 대사 하나하나가 머리에 박히는 기분이에요!
글 분위기도 퇴폐적이지만 아련한게 뭔가 슬퍼지는 거 같은 기분이에요 ㅠㅠㅠㅠㅠ
글 잘 읽었습니다!

6년 전
비회원237.235
와ㅠㅠ 해피엔딩이라 정말 다행이에요ㅠㅜ
진짜 읽으면서도 호석이가 배신자아닐까 오다한테 잡히는거아닌가 계속 걱정했는데ㅠㅠ
작가님 역시 필력 짱짱.. 어서 다음작품..써주세요ㅠㅠ

6년 전
비회원17.137
너무 잘쓰시는딩....;,bbbbbbbㅠㅠㅜㅠ 작가님뮤 사랑해여♡
6년 전
독자9
벽성입니다!
아 작가님 아아으ㅏ아 다음 이야이는 없나요 열린결말도 나름의 매력이 있다만 하ㅏ으앙
다음에도 이런작품 또 기대하고 싶네요 ㅎ

6년 전
독자10
헐헐열린결말...!너무잘읽었어요ㅠㅠ내용도탄탄하고설마난희가그런일을할줄은상상도못했는데반전의반전을거듭하는내용이네요!잘읽고갑니다♡♡
6년 전
독자11
새싹이입니다!!!!난희야 호석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다행이다 정마류ㅠㅠㅠㅠㅠㅠㅠㅠㅠ글 분위기도 짱이네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6년 전
비회원181.176
토마토마에요~ 진짜 이렇게 묘하면서도 기분이 은근히 좋아지는 여운이 남는 글은 오랜만에 보는거 같아요ㅎㅎ 어제 사실 독립단체에 관한 뮤지컬을 보고와서 그런지 더 몰입됐어요
6년 전
독자12
[우즈]에욧 .....ㅠㅠㅠ하 진짜 명작이에요!!! 호석이랑난희 너무 아련한데 둘이 해피엔딩이라구 생각할께욥 ... ㅠㅠㅠㅠㅠ 암살안하고 둘이 도망갈줄알았는데 예상으외라서 살짝놀랐답니닷 ㅠㅠ그래두 너무 재밌게보구가요!!
6년 전
독자13
슙슙해입니당
분위기 대박적 아닙니까 진짜ㅠㅠㅠㅠㅠ 난희랑 호석이 잘 탈출해서 행복하게 살거라 믿습니다ㅠㅠㅠ!!!!!!

6년 전
독자14
결국 둘이 행복하니까 그럼 됐어요 그걸로 충분합니다ㅜㅜㅜㅜㅜㅜ 호석이의 미친듯한 분위기에 빠졌습니다ㅜㅜㅜㅜㅜ
6년 전
비회원171.160
그래도 잘돼서 다행이네요ㅜㅜㅜㅠ 난희랑 호석이 케미가ㅠㅜㅠㅠ 잘보고가요♡♡
6년 전
독자15
개구락지에요! 와ㅠㅠㅠㅠㅠㅠ밀린거 다 읽고왔는데ㅠㅠㅠㅠㅠㅠㅠㅠ하ㅠㅠㅠㅠㅠㅠㅠ이렇게 좋을수가 없습니다ㅠㅠㅠ
6년 전
비회원113.17
작가님 정말 와... 분위기랑 정말 이런 글 처음 봤어요 진짜 그 감정들이 다 전해지는 것 같아요 아직도ㅠㅜ 읽는내내 소름 돋았어요 작가님 ㅠㅜ 되게 짠하고 아련하네요ㅜㅜㅜ
6년 전
독자16
윤기야입니다 난희랑 호석이 잘 빠져나가서 다행이에요 이제 둘은 행복할 일만 남았겠죠 ㅠㅠㅠㅠ 뒷 이야기도 보고 싶네요 흑흑
6년 전
독자17
몬모니
아 정말 해피엔딩이였으면 했는데 열림 결말닌가요? 세상에...난희랑 호석이...어떻게 된거예요 ㅠㅠ으어어유ㅠㅠㅠㅠ

6년 전
비회원169.223
난희랑 호석이는 같이 떠나서 행복하게 살고 있을 거라고 믿을게요ㅠㅠㅠㅠㅠ 이런 시대물 읽을 때마다 저릿저릿하네요 역시 자까님bb 다 엄살이었엏ㅎㅎㅎ
6년 전
독자19
아니 대박입니다ㅠㅠㅠㅠ 아 더 길었으면 하는 욕심도 생겨요ㅠㅠㅠ
6년 전
독자20
봄감자입니다
난희랑 호석이ㅠㅠㅠㅠ그 후에 무사히 잘 살겠죠?ㅠㅠㅠㅠ이번 글은 뭔가 슬픈여운이 남는 것 같네요...아련미...뒷이야기가 궁금하네요ㅠㅠ

6년 전
독자21
핫초코
헐... 뒷 내용이 시급합니다...제발...현기증 ㅠㅠㅠㅠ
그래도 무사히 성공해서 다행이야ㅠㅜㅠㅠ 난 또 막 실패할 줄 알고 마음 졸였눈데ㅠㅠ나비모양 문신이 그 단체표시였다니 뭔가 있을 줄은 알았지만 그걸로 알아본거군

6년 전
독자22
두유망개에요 !!! 해피엔딩이어서 다행이에요ㅠㅠㅠㅠㅠ 내심 들킬까봐 엄청 걱정했는ㄷ0 ㅠㅠ
6년 전
독자23
둘이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네요ㅠㅠㅠ 브금이랑 글이랑 정말 찰떡이에요 엄청 아련해요ᅲᅲ 덕분에 좋은 글 읽고 가요 작가님 감사합니다!!
6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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